자기의 심장을 부딪쳐 가면서 그린 "찬란한 전설로 남은 화가, 천경자"

 

자기의 심장을 부딪쳐 가면서 그린 "찬란한 전설로 남은 화가, 천경자"


내 슬픈 자화상의 22페이지,1977작

서론: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 천경자

1950년대 서울 명동의 카페는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 이곳에서는 김환기, 이중섭, 박서보 같은 화가들과 박인환, 김광균, 조지훈, 김수영 같은 시인들이 자유롭게 교류했다. 그러나 이 예술적 소굴을 논할 때 절대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화가이자 작가로서 10권이 넘는 수필집을 출간한 천경자다.

천경자는 원색의 체크무늬 코트를 입고 명동을 활보하던 당대의 '핫 아이콘'이었다. 화가이면서도 문인들과 깊은 우정을 나눴고, 소설가 박경리와 특히 친했다. 인기 있는 수필가였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화단의 슈퍼스타였다. 그의 개인전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렸으며, 관람객들은 그의 사인을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서곤 했다.

그러나 천경자의 삶은 화려한 명성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창작의 영감을 얻기 위해 교수직을 포기하고 전 세계를 여행하는 결단을 내렸다. 그가 걸어온 길은 찬란한 전설로 남았지만, 동시에 '미인도' 위작 논란이라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과연 그의 예술 세계와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본론: 천경자의 삶과 작품 세계

1. 귀여움을 독차지한 어린 시절

1924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천경자는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옥자'라는 본명과 '짜야 짜야'라는 애칭을 얻었다. 어릴 때부터 미술에 관심을 보였던 그는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두 차례 입선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유학 시절 부유했던 집안의 가세가 기울었고, 그는 전쟁과 가난 속에서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2. 상실과 슬픔 속에서 피어난 예술

귀국 후 결혼했지만 남편은 생활력이 부족했다. 결국 그는 미술 교사를 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한국전쟁 중 남편이 행방불명되었고, 이후 또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 역시 유부남이었다. 사랑과 상처, 가족의 죽음까지 연이은 시련 속에서 천경자는 고통을 예술로 승화했다.

그의 대표작 '생태' 는 광주에서 뱀을 관찰하며 탄생한 작품으로, 당시 예술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인식을 깨뜨렸다. '생태'는 대한미협전에 걸리지 못했지만, 다방 주방에 처박아둔 작품을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가 그의 예술적 파급력을 증명했다.

3. 교수직을 뒤로하고 떠난 세계 여행

1950~60년대 천경자는 교수이자 작가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안정된 삶 속에서도 그는 영감을 잃어가는 두려움을 느꼈다. 결국, 교수직을 내려놓고 세계여행을 떠나며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여성과 자연, 동물을 소재로 한 작품을 남겼다. '알라만다의 그늘Ⅱ' 에서는 타히티의 풍경과 함께 표범과 닮은 여인의 형상을 그려 넣었다. 이는 그의 정체성과 이상향이 담긴 자화상과도 같았다. 또한,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초원' 에서는 황량한 아프리카 초원에서 느낀 고독을 강렬한 색채로 표현했다.

4. 천경자의 여성들: 자화상을 통한 내면의 투영

천경자는 끊임없이 여인을 그렸다. 이는 단순한 초상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과 환상을 투영한 자아상이었다. 그의 대표작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는 스물두 살의 자신을 떠올리며 그린 자화상으로, 길게 늘어진 목과 슬픔이 깃든 눈이 인상적이다. 특히 머리에 얹힌 네 마리의 뱀은 그가 살아온 삶의 상처와 고통을 상징했다.

또한, '길례 언니' 는 그가 실제로 알고 지낸 인물로, 가난 때문에 꿈을 접어야 했던 여성의 초상이었다. 그의 그림 속 여성들은 모두 천경자 자신의 일부이자, 시대를 살아간 여성들의 초상이었다.

5. '미인도' 위작 논란과 영원한 상처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미인도' 가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나, 끝내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작품은 자신의 심장을 부딪쳐가며 그린 분신과도 같다"며 울분을 토했지만, 미술관 측은 감정 결과를 내세우며 진품으로 확정했다.

천경자는 "자기 자식인지 아닌지 모르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며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오히려 '자신의 그림도 몰라보는 정신 나간 작가'로 몰리며 한국 미술계에서 소외당했다.

결국, 그는 절필을 선언하고 큰딸이 있는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서울시립미술관에 자신의 작품 93점을 기증하며 마지막 예술적 유산을 남겼다. 2015년, 그는 고국이 아닌 뉴욕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림설명 : 푸른색 & 보랏빛: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하며 신비로움을 강조 강렬한 붉은색 & 주황색: 감정적인 표현을 더하고 대비 효과 금색 & 노란색 포인트: 화려하고 신비로운 느낌 강조 배경에 초록 & 청록색의 조화: 자연과 신비로운 세계의 융합


결론: 예술가의 한을 넘어, 다시 빛을 발할 수 있을까?

천경자는 '미인도' 사건으로 인해 마지막까지 깊은 상처를 안고 떠났다. 그의 이름이 위작 논란으로만 기억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단순한 개인적 고통을 넘어, 한국 채색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고, 동양화의 현대적 변화를 이끌었다.

2025년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되는 해다. 유족들은 여전히 '미인도' 사건과 관련해 국가 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 중이다. 과연, 그의 한은 늦게라도 풀릴 수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미완의 퍼즐로 남을 것인가?

천경자의 찬란한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의 작품이 가진 힘과 예술적 가치는,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을 것이다. 이제는 그를 '미인도' 논란이 아니라, 위대한 예술가로서 다시 조명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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